[중국영화] 건국대업(建國大業) 2009년작

중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제작된 건국기념 영화

* 운영자 의견: 이 영화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서 제작하고 기획한 영화이므로 
  우리가 알고, 배운 내용과는 다소 다른점이 있습니다,
  평가나  의견 없이 영화로만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오쩌둥(모택동) 은 '부하를 아끼고 정이 넘치는 따뜻한 정치가'로
장제스(장개석) 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정치가'로 그린 영화입니다.
장제스를 단순히 항일운동의 영웅으로 떠받들 순 없겠지만 국공내전의 패배자로만 평가되는 것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때로는 무책임하고 때로는 우유부단했지만 무너져 내린 왕조의 폐허 속에서 쑨원의 유지를 계승해 
근대국가의 틀을 다진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장제스와 국민당이 중국이라는 나라를 위해서 새로운 상부구조를 창조했다면,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하부구조를 해체해 다시 꾸렸고, 경제개혁을 통해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사이의 
새로운 제도적인 연결을 시도하는 일은 덩샤오핑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 실행에 옮겨졌죠. 바로 중국의 현대사입니다.

감독 : 한삼평, 황 지엔신
(중국,홍콩배우 전체출연영화)
출연 : 여명, 유덕화, 양가휘, 이빈, 이연걸, 연진, 류화, 유엽, 등초, 범위, 펑 샤오강, 갈우, 공배필, 곽소동, 후용, 황성의, 황효명, 쟝 웬, 손홍뢰, 동대위, 왕보강, 오우삼, 무강, 사강, 묘포, 영정, 양약혜, 협소갱, 영달, 우용, 장한위, 장지엔야, 장쯔이, 후쥔, 손흥, 조가범, 성룡, 진도명, 천 총, 지안빈 첸, 차영리, 오군매, 조미, 장국립, 류경, 진곤, 왕학기  외 다수



1927년 4월부터 1950년 5월까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사이에 일어난 국공내전(國共内戰, 인민해방전쟁, Chinese Civil War) 중 영화는 1946년부터 1950년까지의 제2차 국공내전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결국 중국 공산당의 홍군(紅軍)의 승리로 끝나게 되죠. 전쟁의 결과로 본토에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의 중화민국은 타이완(대만)으로 패주하여 쫓겨납니다.
이러한 국민당의 패배는 국민당의 심각한 부정부패와 대부분 농민 출신이라 민폐를 끼치지 않은 홍군의 도덕적인 모습 등에 기인합니다.
레닌주의를 계승하여 농민을 혁명의 주체로 본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혁명 이론도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이유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죠.

일본이 패망한 직후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점령지 정리 등을 둘러싸고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긴장이 고조됩니다.
오랜 전쟁에 지쳐 있던 양측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양측은 협상을 개시하게되죠. 바로 영화의 첫 장면입니다.
1945년 8월부터 약 한 달 반 정도 충칭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직접 만나 회담을 가졌고 10월에 양측의 협정이 맺어져서 내전을 피하고 정치의 민주화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냅니다.

하지만 양측의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고 미국의 마샬 장군이 중재하여 내전을 피하기 위해 양측을 조율하고 공동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협상이 1946년 1월부터 시작, 어느 정도 합의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를 인준하는 과정에서 국민당은 다시 합의안을 번복하고 공산당은 이에 항의하여 결국 합의안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죠.
그해 6월 국민당군은 본격적으로 공산당 지구를 침공하여 전면적인 내전을 개시합니다.
초기에 국민당군은 병력, 장비, 보급 등 모든 면에서 공산 측보다 우세했고, 특히 미국의 지원을 받아 무장하고 있어서 내전은 곧 종식될 듯이 보였죠.
특히 1947년에는 후쫑난 장군의 지휘하의 20만 명의 병력이 중국 공산당의 본부가 있던 옌안을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린 국민당군은 지나치게 병력이 분산되는 전략적 오류를 범하게 되죠.
게다가 국민당 정부의 총체적 부패, 인플레로 인한 경제 붕괴, 그리고 민심이반 등이 어우러져 1948년부터는 공산당 측에 유리하게 내전이 전개됩니다.

흔히들 중국국공내전의 3대 전투로 랴오선전투[遼瀋戰役], 화이하이전투[淮海戰役], 핑진전투[平津戰役])를 꼽는데,

1948년 가을 린뱌오가 지휘하는 동북 인민 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민당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랴오선 전투)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2007년 펑샤오강 감독의 영화 '集結號' -지젠하오에 화이하이전투(淮海戰役, Huaihai Campaign)가 그려지죠.
1948년 9월 부터 1949년 1월까지 벌어진 화이하이전투(淮海戰役, Huaihai Campaign)는 쉬저우(徐州)를 중심으로
국민당의 류즈(劉峙)군단 60만명과 중국공산당 화동(華東)야전군과 중원(中原)야전군 등 60만명이 벌인 중국국공내전의 대표적인 전투중 하나입니다.

그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중원(中原)야전군 사령원 류보청(劉伯承), 부사령원 천이(陳毅), 정치위원 덩샤오핑(鄧小平). 화동(華東)야전군 사령원 대리 겸 정치위원 대리 쑤위(粟裕), 부정치위원 탄전린(譚震林) 등이 이끄는 중국공산군 지휘부에 의해 진행된
화이하이전투(淮海戰役, Huaihai Campaign, Battle of Hsupeng (徐蚌會戰))는 3단계로 나뉘어 전개되었는데,

# 제1단계(1948년 11월 6일- 1948년 11월 22일) ; 국민당 황보타오(黃伯韜)병단이 섬멸되고 쑤(宿) 현 공산군에 함락되어 류즈(劉峙)군단이 포위되고 병력은 분할상태에 빠짐.
# 제2단계 (1948년 11월 23일 - 1948년 12월 15일) ; 국민당 황웨이병단이 섬멸되고 사령관 황웨이가 포로가 되며, 두위밍(杜聿明)집단군이 포위됨.
# 제3단계(1948년 12월 16일 - 1949년 1월 10일) ; 국민당 두위밍(杜聿明)집단군이 섬멸되고 두위밍(杜聿明)이 포로가 됨.

66일 동안 진행된 이 화해전투에서 공산당의 전사상자는 13만 3,000명이었고 국민당의 1개 전략 집단군 55만 5,000명이 와해되었습니다.
이 중에는 장제스의 5대 주력군인 제5군과 제18군이 포함되어 있었죠.
당시 정치위원 덩샤오핑(鄧小平)은 화동(華東)야전군과 중원(中原)야전군 지도부로 구성된 총선전위원회 서기로 전선의 모든 사무를 관장했다고 합니다.

결국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이어 파죽지세로 4월에는 창 강을 건너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켰습니다.
이어 5월에는 최대 도시 상하이를 함락시켰고 10월에는 국민당 손에 남아 있던 최후의 대도시인 청두마저 함락되어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대만)으로 도피하게되죠.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합니다. 영화 후반부 내용이 되겠네요.
















여기까지는 영화 속 내용을 따라간거고...


좀 더 덧붙이자면, 국공내전은 미국과 구소련으로 대표되는 분할된 냉전시대의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이 벌인 대리전 성격이 짙습니다.
국민당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고 제2차세계대전 직후 다른 유럽국가들처럼 전후복구에 바빴던 소련도 해줄 수 있는 한 최대한 중국공산당에게 지원을 해줍니다.
마오쩌둥의 원래 플랜은 중국을 성 단위로 독립시켜 해방구를 만드는 것이였습니다. 구소련의 연방제를 모방한 것이죠.
국민당에 비해 열세였던 공산당이 게릴라전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최선의 길이였습니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국민당은 항일전쟁에서 승리를 한 적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중국공산군인 팔로군이나 신사군 또한 별반 다를 바 없없죠. 전투는 국민당군에 맡기고 세력보존에만 몰두했습니다.)

국민당군은 늘 일방적으로 밀렸고 방어에 급급했습니다.
패배만 하는 군대라도 미국입장에선 일본군의 세력을 분산시키려는 목적하에 파격적인 지원을 해줍니다.

일본이 물러난 직후 국공내전이 벌어지자 국민당은 부실한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죠.
초반 압도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이를 유지하지 못하고 1947년 이후 연패를 당합니다.
이에 승승장구하게된 마오쩌둥은 게릴라전이 아닌 전면전을 택하고 국민당은 결국 대만까지 밀리게 되죠.

인민해방군이 밀려오자 국민당군은 두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타이완으로 들어가 시간을 버느냐 아니면 쓰촨으로 들어가 병력을 수습해 죽기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싸워보느냐.
여기서 국민당 수뇌부는 타이완을 택합니다.
방어는 용이하지만 본토로 다시 진출하기는 어려운 섬.
타이완을 선택하는 순간 중국 각지에 분산되었던 국민당군의 잔존세력은 고립되어 1950년대까지 저항하나 인민해방군에 의해 각개격파를 당합니다.

마치 6.25 초기 전략적 실패로 회자되는, 한강 인도교의 조기폭파로 인해 그 때까지 남아있던 한강이북 국군전력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대다수를 잃게되는 결과를 자초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죠.

앞서 말씀드렸지만, 일본과의 전쟁은 국민당군이 도맡아 했지 팔로군이 이룬 전과는 많지 않습니다. 홍군 혹은 팔로군의 전과가 후세에 많이 미화된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실상 내세울 전략도 전술도 없는 민병대 수준의 군대에게 (일본군에게 연패를 당하긴 했어도) 전쟁경험이 풍부한 정규군이 일방적으로 밀린 겁니다.

대만으로의 상륙을 지시한 마오쩌둥과 인민해방군 야전사령관들에 의해 금문도전투가 벌어지는데...
인민해방군 1만에 압도적인 해,공군의 지원을 등에 업은 3만의 국민당군의 전투에서 국민당군은 대만을 지켜내는데 성공합니다.
개인이 소지한 화기마저도 국민당군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던 인민해방군이 1만의 병력으로 3만의 적과 싸워 손쉽게 승리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게.. 오히려 국민당군에겐 수치스러운 일이죠.